20대 군생활 시절 힘든 훈련들 한번을 요령부려서 열외하지 않고 받을수 있는건 다 받으면서 몸을 무척이나 혹사시켰었다. 뭐 군생활 잘한다고 중대장님에게 칭찬받고 말뚝을 박으라고 말하던 선임하사들이 한둘이 아니였던것도 사실이다. (병장을 달고 측/역 레펠 훈련을 하는데 두어번만 하면 될걸 내 스스로 자세가 잘 안나온다고 열번넘게 뛰어대니리는걸 보고 너같은 병장은 처음본다고 말하던 교관 중사님도 있었다) 이제 40을 넘긴지 그리 되지 않았지만 고관절에 통증이 심해서 병원을 많이 다녀보았다.
퇴행성 관절염이라 물리치료와 진통제로 생활에 지장없도록 관리해 나가야지 상태를 호전시키거나 되돌릴수는 없다는 말만 들어왔다. 향정신성 (뭐 마약이나 다름없다) 진통제는 그렇게 간에 좋지 않다고 하는데 그걸 한달분량으로 60알씩 처방해주는데 이걸 다 받아먹고 살다간 60도 못넘기고 간경화로 죽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운동으로 통증을 줄여볼 방법을 찾다가 요가쪽에 눈이 돌아가게 되었다.
Hot Yoga의 대표격으로 비크람 요가 (비크람 쵸드리라는 사람이 미국 하와이에서 시작해서 전파시킨 24 요가자세 시퀀스로 90분간 진행된다. 비크람 쵸드리라는 인물은 존경도 받겠지만 잡음이 많이 들리는 문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가 있는데 집사람의 추천으로 3년전부터 해왔다. 딱 3가지만 말하자면…
1년 맴버쉽이 정말 비싸다. 우리돈으로 백오십만원 정도 한다.
군대에서 유격에 공수훈련도 다 받아봤지만, 사실 이 요가가 더 힘든것 같다. 과장 아니다…
그렇게 물리치료를 받아도 효과를 보지 못했던 고관절의 범위가 넓어지고 통증이 많이 줄었다.
중독성이 정말 심한것 같다. 장거리 구보를 1시간 가까이 하고 앉아서 숨을 헐떡일때 은근히 몰려오는 만족감과 희열감을 아는지? 이 때문에 90분동안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날마다 가고 싶어진다. 이젠 스트레칭보다는 좌우 대칭과 균형에 신경을 더 쓰면서 수련을 하는데 일주일에 한 3번정도 가는것 같다.
돈이 무섭다 보니 모든 시설 보수및 개조공사를 내가 퇴근하고 밤에 혼자 한다. 남을 고용할 능력이 되지 못하니깐…
아뭏든, 전기공사와 전등 추가설치및 벽을 올릴수 있는 준비는 다 마감되었다. 형광등 2개 추가로 달고, 오래된 낡은 아웃렛및 스위치를 추가로 설치하고, 드라이월을 올릴수 있도록 전선을 다른쪽으로 우회하는 간단한 작업밖엔 하지 않았지만 돈은 한 30만원이 넘게 들어간것 같다…재료비로만 해서.
이번달 말에 주급 받으면 그 돈으로 드라이월 몇장 사서 대충 벽 마감하고 페인트칠 할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돈없고 백없으면 비참하다고 했던가? 영업허가증을 받아보기 위해서 타운쉽의 조닝 오디넌스 오피서와 이야기를 해보면서 이 말을 참 뼈저리게 실감했다. 아무리 항변해 봐야 네놈따위에게 낭비할 시간은 없다는 태도이다. 즉, 정식 허가를 받고 업장운영은 불가능하다는 말.
어젠 바닥에 카페트를 깔고 막내딸 혜선이와 한시간정도 운동했다. 밝고 깨끗하게 청소해 놓으니 제법 쓸만해서 만족스럽긴 하다. 운동하다보면 돈은 벌리겠지…안벌리면 또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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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년간 근무해오던 체육관의 관장님이였던 짐 페카씨가 2013년 3월 한 주말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셔버린 일이 발생하였다.
본인도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았던 까닭에 도장 경영에 관련된 정보를 남들과 함께 공유하는 편이 아니였고, 50중반의 나이에도 결혼을 한적이 없어서 처나, 자식도 없이 혼자 외로이 지내는 사람이였다.
이런 관장님이 느닷없이 유서 한장도 없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체육관 소유권 이전과 경영에 관련된 문제로 지도관장님과 사범들간의 상의가 장례식이 치러지는 와중에도 계속 되었는데, 나름 체육관의 경영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재정과 관리에 관련된 상황만 잘 파악되면 한국에서 돌아옴과 동시에 함께 동업형식으로 체육관을 함께 운영해보자고 지도관장님과 대충 합의를 보고 한국길에 올랐다.
부모님의 건강문제로 한국에 방문을 한것이였지만, 운동은 계속 하고싶어서 귀국할때마다 찾아뵙는 현동수 관장님의 체육관에서 운동하면서 좋은 지도를 많이 받고 국기원에서 특심까지 보는 좋은 경험을 하며 나름대로 알찬 3주를 보내고 기쁜 마음으로 귀국을 할 수가 있었다. 귀국해서 뉴욕 JFK공항에 도착한게 일요일새벽 이였고, 4월 15일 월요일 저녁 6시-9시부 수련을 학생들과 함께 하려고 체육관에 도착을 했는데…
뭔가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한게 이때 이다.
3주간 한국 방문때문에 수련시간에 못나온다고 수련생들에게 다 설명해 주었는데, 로버트라는 중학교 수련생 하나가 (개인적으로 날 참 잘 따르는 학생이였다) 나에게 대뜸 “다시 사범님으로 운동 함께 하실 계획은 없는건가요?”라고 대뜸 묻는것 아닌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전혀 파악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2시간 가량 수련생들과 함께 운동을 하고 지도관장님이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 있어서 인사를 드릴려고 갔더니 책상에 이미 자기 이름으로 “총 관장”이라고 직함을 찍어서 명함을 새로 파놓고, 20세의 젊은 여자 사범인 브리짓의 이름에 “체육관 관리 지배인”이라고 명함을 만들어서 올려놓은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예전관 달리 그다지 반가워 하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대하면서 처음 하시는 말이 가관이었다. “이번엔 국기원에서 뭘 어떻게 배워와서 여기와서 또 뜯어고칠 생각인가?” 였다. 기존에 운영하시던 관장님도 돌아가셨고, 사실 80년대부터 누가 정확히 만든 태권도 지도법에 품새인지를 알수 없는 현존의 교육내용을 개선하는 의도에서 팔괘품새와 창작품새를 버리고 태극품새를 지도하도록 하고, 고주류 가라테같은 넓은 폭의 서기는 바뀐 태권도 서기로 수련생들을 지도해,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보급된 한국 태권도를 가르키는게 옮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4년동안 피땀으로 수련생들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얻어내는 1단 단증은 USAT나 WTF주관 행사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엉터리 단증이니, 정식 국기원 단증을 발급해서 수련생들을 대회도 나가보도록 장려해서 경험을 키워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생각해 보지…” 라고 짧은 한마디로 대화가 끝났다.
도복을 개서 손에 들고 체육관 문밖을 나서니 학부형 하나가 내게 말을 거는데 그 서두가 “뭐 정치적인 문제에 개인적으로 개입하고 싶진 않지만…” 이였다. 3주만에 도장을 처음 나가서 수련생들과 학부형들을 대했고, 운동이 끝날때까지 지도관장님과는 한마디의 대화도 하지 않았는데, 왜 저런 말들을 걸어왔을까…
집에와서 지난 6년간 짐 페카 관장님과 함께 한 시간들을 되돌려 보았다. 체육관 관인도 없어서 도장을 내가 새로 파주었고, 단증이나 승급증은 어떻게 꾸미고 도장을 어떻게 찍는건지, 15세가 안된 학생들에겐 검은띠를 줘서는 안된다는 것부터 품띠라는걸 도장이 생긴후로 처음 소개를 했고, 붉은색이 아래로 내려가게 띠를 묶어야 한다는것 까지 여러 부분을 조금씩 바꿔나간게 사실이였다. 아이들 소꿉장난처럼 구질구질하게 만들어져 있는 웹사이트도 내가 새로 만들어 주었다. 돈 한푼 받지않고. 도장을 바르게 홍보하면서 좋은 내용으로 올마른 태권도를 가르쳐야 한다는게 내 생각이였고, 정식 사범도 아니면서 자원봉사나 다름 없는 자격으로 이렇게 노력하고 신경써 주는 나를 짐 페카씨는 참 좋아했었다. 연말엔 아이들 선물까지 사주면서 우리 가족 전체를 그렇게 잘 챙겨주었는데 난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 체육관의 다른 직원들도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마 그게 잘못된 생각이였나 보다.
짐 페카씨가 돌아가시고, 내가 자리를 비움과 동시에 제거해야할 인물로 내 이름이 분명 거론 되었을 것이다. 항상 눈에 거슬리는 존재로 생각했을 테니까… 얼마전에 알게 된 내용 이지만, 유한회사 법인 승인부터 세무관련 내용까지 도장인수는 4월초에 이미 마무리가 되었다고 한다. 모든 결정이 다 끝난 상태에서 내가 귀국을 한것이였다. “이제 필요없으니 도장 그만 나오게”라는 말을 하고 싶은데 다짜고짜 그런 말을 하면 자기 인상만 구기니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별다른 말을 못하고 그냥 집에 보낸것 이겠지…
4월 16일 아이들과 함께 운동을 하러 체육관을 나갔다. 수업엔 신경 안쓰면서 도장 구석에서 내 아이들과 몸풀기와 미트 발차기만 하고 있었다.
지도 관장님이 날 보더니 잠깐 이야기좀 하자고 한다. 한숨을 쉬더니 대뜸 이런다. “기존 사범들이 이런식으로 오랜동안 운동을 해왔으니 지도 방법을 바꿀 생각은 없네. 정통 태권도도 좋고 어딜가던지 인정받는 태권도도 좋겠지만, 난 돈벌이가 되는 McDojos (미국에서 상업적 목적만 두고 운영되는 사이비 무술도장을 비꼬아서 하는 말이다) 를 운영하는게 꿈이야. 태극 품새같은것도 말야 밋밋하고 재미가 없는데 그런것보단 발차기 많이 들어가있는 창작 품새가 학생들에겐 좋지. 뭐 생각이 다를테니 아이들 지도하라고 하진 않겠네. 뭐 그만두던 말던은 뭐라고 할수 없지만, 뭐 도장에서 일 있고 심사보고 그러면 같이 나와서 일좀 해주고 그러면 좋겠는데, 이젠 학생들과 함께 운동못한다고 다 때려치고 나가거나 그러진 않겠지?” ..라고 하면서 피식 웃는다. 나가지 말라고가 아니고 “이정도 설명해 줬으니 자네 발로 스스로 걸어나가게. 내 체면을 봐서라도…”가 본 의미이겠지만.
2007년 아이들과 처음 도장을 나가서 학부형의 입장으로, 또 1년 계약을 하면서 몇백만원의 돈을 수련비로 내면서 물어보았었다. “이곳의 서기와 숨쉬는 방법, 그리고 출처를 알수 없는 변형품새들에이 참 보기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다 해도 카마나 사이같은 정말 현실성 없는 무기는 왜 가르키시는 건가요?”라고… 지도 관장님의 답변은 간단 명료했다. “내가 원래 당수도 출신인데, 나도 사실 여기 교육내용은 맘에 안들어. 내가 관장이면 이런거 다 때려치고 정통 태권도를 가르치겠어.” 짐 페카 관장님이 돌아가시고 체육관 소유권 문제로 긴급회의에 들어갔을땐 “난 이미 정년퇴직할 나이고 플로리다로 이사갈 준비도 되어있으니 내가 체육관을 인수한다는건 불가능 하네. 내가 도와줄테니 젊은 사범들간에 함께 뭉쳐서 잘 해봐”라고 말을 하면서 내겐 걱정하지 말고 한국을 다녀오라고 말도 했었다.
4월 17일 지도관장님이 페이스북에 글을 하나 올렸다.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지만 올바른 용단을 내렸다”라는 한줄 이였다.
이미 오래전에 결정을 보고 다른 사람들과 입을 맞춘 내용을 이 날에 와서 세삼스럽게 결정했다고 말하는것은 우습지만, 날 체육관에서 내보낸게 용단이라고 자찬을 하는것엔 시비를 걸고 싶지 않다. 어차피 난 정규고용직도 아니였고 태권도가 좋아서 도장에서 모든 일을 다 해주면서 수련도 함께 해준 아버지 봉사자 였을 뿐 이니깐. 그렇지만 “올바른 용단”이라는 오만한 발언은 인정할수 없다.
사람 살아가는데 배신도 있고, 오해도 많으리라.
허나, 앞에 놓인 이득에 눈이 어두워 함께 해온 사람들까지 다 벼랑으로 밀어 떨어트리면서도 눈하나 깜짝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건 사실 이번에 처음 경험해 본다.
난 태권도를 생계유지 수단에 사용하는 잡기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초등학교 시절 국기원 승단심사비를 어머니가 내 주실수 없어서 수년간 빨간띠만 차고 운동을 하면서도 행복했고, 대학교때 동네 도장에서 어린 학생들과 함께 운동을 하면서 중고등학생들이 부러워 할정도로 내 뒤후리기와 옆차기는 멋졌었다. 20대 후반에 미국에 와서 정착을 하면서 생계유지에 목숨을 걸면서 30대 초반까지 10년 가까이 운동은 전혀 하지도 못하면서 하루 16시간씩 일하고 돈만 벌었다. 집엔 내가 보살펴야할 아이들이 있고, 나를 믿고 따라와주는 아내가 있고, 미국까지 와서 비참하게 실패해서 부모님께 더 불효를 할수가 없었기 때문이였다.
삶의 기반이 좋아지고 다시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뗀 이미 몸이 망가진 후란걸 알게되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퇴행성관절염에 고관절 무혈괴사증까지 있다. 반 병신인 셈이다… 아파서 잘 걷지도 못하게 힘든 날도, 직장을 구할수가 없어서 수입이 전혀 없어 하루하루가 비참했던 그런날도 내 곁에서 나를 강하게 이끌어 줬던것이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이였고, 비록 수련을 할수는 없었지만 태권도였다. 난 그래서 태권도가 좋다.
집사람과 창고 정리를 시작했다. 필요없는 물건 다 버리고 차가 두대나 들어가는 차고이니, 벽좀 손보고 바닥 새로 깔아서 아이들과 함께 운동을 하는 가족 태권도장을 함께 만들자는 집사람의 요구 때문이다.
태권도 클럽을 이렇게 시작해서 비영리 태권도장을 한번 내가 차려서 운영해볼 생각이다.
일단 아이들과 집사람부터 똑바로 가르치면서 함께 운동해야 겠다.